유럽연합(EU)이 반도체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EU는 세계 반도체 수요 중 20%를 차지하는 세계 3위 시장인 반면 반도체 생산량은 9%로 현저히 낮다. 지난 코로나19 팬데믹이 증명했듯이 불안정한 공급망은 국가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 EU는 유럽 내 반도체 생산을 목표로 해외 기업 유치 및 유럽 기업 생산시설 확충에 나서고 있다. 이를 위한 정책적 지원도 뒷받침됨에 따라 향후 어떤 경쟁력을 갖추게 될지 주목된다.
대규모 생산기지 만드는 유럽
EU는 유럽 지역 내 반도체 생산을 위해 최근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개별 회원국과 지방정부 역시 반도체 생산시설 확보와 자체 생태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유럽은 미국과 중국에 이은 세계 3위 반도체 시장으로서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인피니언, NXP, 보쉬 등 주요 반도체 기업이 포진돼 있다.
다만 약점으로 지적된 부분은 현지 자체에서의 반도체 생산 시설 및 생산량이 적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부분은 지난 코로나19 팬데믹때 확연히 드러났다. 유럽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나 팹리스 역량이 뛰어난 반면 직접 생산하는 능력이 부족해 불안정한 반도체 공급망이 무엇인지를 경험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유럽에서 가장 눈에 띠는 변화는 반도체 생산시설의 확장이다. 지난 6월 인텔은 두 건의 투자 계획을 밝혔는데, 첫 번째는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반도체 공장 확장이고, 두 번째는 폴란드 브로츠와프 인근에 구축할 반도체 공장이었다. 독일 반도체 공장의 경우 약 300억 유로가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인텔은 계획했던 예산의 두 배를 투입하고, 독일 정부 역시 보조금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폴란드에 지어질 공장 역시 46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로, 이곳에서는 반도체 재가공 및 검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미 독일과 아일랜드에 생산시설이 있는 인텔은 폴란드를 두고 “반도체 합작에 이상적”이라고 밝혔다.
이외에도 유럽 내 반도체 기업의 생산시설 확장은 현재진행형이다. 인피니언은 올해 50억 유로를 투자해 독일 동부 드레스덴에 생산시설 만들고, 2026년 이후 전력 반도체와 아날로그 반도체 등을 생산할 계획이다. 여기서 EU는 팹 건설에 10억 유로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이하 ST)는 지난해 말부터 7억3000만 유로를 투자해 이탈리아 카타니아에 실리콘카바이드(SiC) 웨이퍼 제조시설을 건설하는 중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 프로젝트에 2억9250만 유로를 지원한다. ST는 글로벌파운드리와도 협력해 프랑스에 57억 달러를 투자해 지난해부터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유럽, 진취적인 정책 변화 주도하다
유럽 내에서 진행 중인 다양한 반도체 프로젝트는 EU에서 합의된 정책 변화와 유관하다. 앞서 EU 집행위원회(EC)는 2030년까지 세계 반도체 생산량에서 EU 비중을 9%에서 20%로 확대한다는 목표로 EU ‘반도체법(Chips Act)’을 발의했다. 이에 EU는 2030년까지 민간·공공부문에서 430억 유로를 지원하는 것을 약속했다.
이 합의는 지난 2022년 2월 EU 집행위가 최초로 제안한 EU 반도체 법안에 대해 유럽의회와 이사회가 동의하고 합의한 것이다. EU는 반도체법을 도입해 제조시설 확대를 포함해 전문인력 양성, 차세대 반도체 기술 연구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33억 유로 규모의 ‘유럽 반도체 실행계획’을 추진할 것을 결정했다. 무엇보다 EU반도체법은 제조공장 증설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 숙련인력 양성에도 초점을 둔다. 지난해 반도체 보조금 계획을 발표한 이후 유럽은 이미 1000억 유로 이상의 공공 및 민간 투자를 유치했다.
이와 함께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7월 유럽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위해 반도체 연구 프로젝트에 공공자금 80억 유로 지원을 승인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EC는 이 프로젝트에 공공자금 80억 유로에 민간자금 137억 유로가 지원돼 총 지원 규모는 약 220억 유로라고 설명했다.
EC는 EU 비회원국인 노르웨이까지 포함해 19개국 56개 기업으로부터 총 68개 ‘EU 공동 관심 분야 주요 프로젝트(IPCEI)’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고 밝혔다. 한편, EU는 민감한 반도체 기술을 보유한 반도체 기업의 과도한 제3국 투자에 제동을 걸었다. 생산시설 확장과 같은 공격적인 전략과 함께 수비적인 요소도 놓치지 않는 모양새다.
EU가 포괄적인 경제안보전략 수립 추진을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향후 EU 정상회의에서 구체적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의 핵심은 반도체 기업의 해외 투자다. EU는 투자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안보 위험을 조사하고, 대응하기 위한 조치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활발한 국제 협력 추진하는 유럽
우리나라와 EU는 최근 반도체 분야에서 최신 기술과 동향을 논의하는 ‘한-EU 반도체 연구자 포럼’을 만들었다. 한-EU 디지털 파트너십 협의회는 지난해 11월 맺은 한-EU 디지털 파트너십을 이행하고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EU 내수시장 집행위원을 수석대표로 신설한 장관급 협의체다.
양측은 이날 첫 협의회에서 한국과 EU가 글로벌 디지털 규범 정립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선 추진하기로 결정했던 11대 협력 과제 중 6개 분야 추진 현황을 점검하고 협력 사항을 논의했다. 특히 양측은 과기정통부의 반도체 국제협력 연구 과제와 EU 반도체 연구혁신 사업으로 한-EU 반도체 공동연구를 추진하기로 했다.
최근 EU는 일본과도 공고한 반도체 동맹을 맺었다. EU는 일본과의 안보협력을 격상해 해양 안보, 사이버 공격 대책, 반도체 공급부족 대책 등에 협력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 보도에 따르면, 양측은 방위와 안전보장 분야에서 장관급이 정기 협의하는 틀인 전략대화 창설에 합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해양 안보와 사이버 공격, 허위 정보 대책, 우주 등의 분야에서도 협력을 확대할 방침이다. 무엇보다 양국은 반도체 산업에 대한 협력 강화도 놓치지 않았다. 이 협력에서는 반도체 물자 관련 공급망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는 조기 경계 메커니즘 구축이 핵심이다. 이뿐 아니라 EU와 일본은 반도체 미래 기술 연구와 인재양성을 위해서도 협력한다.
헬로티 서재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