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알 죽고 내일 만나”
티모는 크레바스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 미키를 구하기는커녕 얄궂은 말만 던진다. 미키는 그런 티모를 올려다보며 담담한 얼굴로 태연히 손까지 흔든다. 영화 도입부부터 잘 죽으라는 말에 덤덤한 미키의 모습이나, 분명 잘 죽으라면서 ‘내일 만나자’고 하는 티모의 대사 앞에 관객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생명체에게 가장 두려운 죽음을 앞두고 미키가 태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대신 죽어주는 사람(익스펜더블)이기 때문이다.
미키는 티모와 마카롱 가게를 차렸다가 망한 뒤, 빚을 갚지 못하면 잔혹하게 죽이기로 악명 높은 사채업체에게 쫓긴다. 미키가 선택한 도주 방법은 기후변화로 망해가는 지구에서 얼음행성 니플하임으로 이주하는 우주선에 타는 것. 하지만 한정된 인원 안에 들기 위해서는 어필할 수 있는 직업이나 능력이 필요했다. 망한 마카롱집 사장님인 미키에겐 그런 능력 따윈 없었으므로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익스펜더블’에 지원하게 된다.

미키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방사능, 바이러스, 극한 기후를 비롯해 미지 행성을 개척할 때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요소를 단 한 사람이 모두 떠안아 대신 죽어가는 실험체가 되는 것이다. 실험 중에 사망한 미키는 생체 정보와 기억을 바탕으로 다시 프린팅된다. 영화는 그렇게 거듭 죽기를 반복해 17번째에 도달한 ‘미키 17’이 일련의 사건을 겪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았다.
영화 속 배경은 2054년으로, 올해를 기준으로 29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디테일봉’으로 불릴 만큼 세세한 설정 설계와 사실적인 연출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 장르를 SF로 잡는다고 해서 터무니없는 설정을 가져왔겠는가. 이에 미키 17 속 배경과 과학 기술이 현시점에서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지구 밖에서도 지속 가능한 먹거리는 가능한가
영화 속 모래폭풍은 기후변화에 따른 사막화와 빈번하게 벌어지는 자연재해를 떠올리고, 지구에서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꿈꾸는 모습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스페이스X의 '화성 탐사 프로그램(Mars Colonization Program)'을 떠올리게 한다. 척박해지는 지구 환경과 장기간 우주 탐사에서 공통적으로 마주하는 문제는 ‘식량’이다.
민간 우주기업과 NASA·ESA 기관에서는 장기 우주 거주를 위한 생존 생태계 구축과 식량 확보 기술을 활발히 개발 중이다. 우주 거주지 내 자원 순환 시스템, 우주 농업, 배양육 및 대체 단백질 생산 등 지속가능 식량공급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는 가운데, NASA와 캐나다우주청(CSA)은 ‘딥 스페이스 푸드 챌린지(Deep Space Food Challenge)’를 열어 장기 우주탐사에 적합한 식량 솔루션을 찾아 나섰다.
이 대회에서 미국 인터스텔라랩(Interstellar Lab)은 ‘뉴클리어스(NUCLEUS)’라는 폐쇄형 생물 재생 시스템으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이 시스템은 채소·버섯·곤충 등을 자동으로 재배해 우주 비행사의 자급자족형 식량원을 제공해 자원 사용을 최소화하고 영양소 다양성은 극대화했다.

이스라엘 푸드테크 기업 알레프팜스(Aleph Farms)는 배양육 기술을 기반으로 세계 최초의 우주 실험을 수행한 기업이다. 이들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소 근육 세포를 3D 프린팅 방식으로 배양해 고기 조직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술은 동물 사육이나 도살 없이 식량을 생산할 수 있어 우주처럼 자원 확보가 어려운 환경에서 단백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증했다. 현재 알레프팜스는 지상용 상업화 설비도 추진하고 있으며 규제 승인에 따라 배양육 제품의 상용 판매를 앞두고 있다.
이미 위험 산업에서 인간을 대체 중인 로봇
미키가 반복적으로 죽음을 맞는 이유는 그가 ‘죽어도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설정은 영화적 상상이지만 현실 산업에서도 이미 인간의 위험을 대신 감수하는 로봇들이 상용되고 있다. 특히 정유 플랜트, 원전, 건설 현장처럼 고위험 산업군에서는 자율 로봇과 원격 제어 시스템이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의 에너지 기업 쉐브론(Chevron)은 보스턴 다이내믹스(Boston Dynamics)의 4족 보행 로봇 ‘스팟(Spot)’을 플랜트 현장에 투입해 자율 순찰을 수행하게 했다. 이 로봇은 고열·고압 구간을 이동하며 열화상 카메라와 센서로 설비 상태를 점검하고 데이터를 실시간 전송한다. 같은 해 미국 건설사 HITT는 해당 로봇으로 천장 작업이나 위험 지역의 자율 점검을 시행해 안전성과 작업 효율을 동시에 개선했다. 원자력 분야에서도 영국 셀라필드 원전은 원자로 내부를 점검하는 자율 로봇을 활용해 방사능 노출 위험을 최소화했다.
이러한 로봇들은 단순히 자동화 차원을 넘어 인간이 직접 수행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실질적 ‘노동 대체’로 진화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 영화 속 미키처럼 반복되고 소모 가능한 노동을 로봇이 떠맡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유전자 복제 넘어 기억까지…복제 인간의 가능성은?
그러나 미키는 단순한 로봇이 아니다. 그는 '기억을 유지하는' 복제 인간이라는 점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성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화두로 생명공학 기술은 과연 이 지점까지 다가가고 있을까.

2013년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학(OHSU)은 체세포 핵치환(SCNT) 기술을 이용해 인간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성공적으로 추출했다. 이 기술은 복제 인간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복제 배아’ 생성의 가능성을 실험 수준에서 입증한 사례다. 1996년 복제양 돌리를 시작으로 꾸준히 연구됐던 복제 동물 분야에서는 2020년, 중국과학원이 인간과 유전자가 거의 일치하는 붉은털원숭이 복제에 성공했다. 이 연구는 영장류 복제로 인간 생리학과 질병 모델을 구현하고자 한 시도로 생명윤리를 둘러싼 논쟁을 다시금 촉발시키기도 했다.
유전자 복제에서 더 나아가 UCLA의 신경과학 연구진은 바다에 사는 연체동물 군소(Aplysia)를 이용한 실험에서 RNA 주입으로 기억 전달이 가능하다는 가설을 실험적으로 뒷받침했다. 이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기억이나 경험이 생물학적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기억을 지닌 복제 존재’에 대한 과학적 실마리를 제공한 사례로 꼽힌다.
이처럼 생명공학은 단순한 생체 복제 수준을 넘어서 기억과 의식을 포함한 ‘개인의 정체성’까지 모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경계까지 도달하고 있다. 미키 17이 관객에게 던지는 철학적인 질문이 실제 기술을 두고서도 끊임없이 논의되는 셈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대체될 수 있을까
미키 17은 SF적인 상상을 더해 만들어진 미래를 그려내지만 기후 위기와 자원 고갈, 산업 현장 속 대체 노동, 인간 정체성의 복제 가능성까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속 가능한 식량 생산, 인간을 대신하는 로봇, 그리고 복제 인간의 생물학적 가능성이라는 주제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을 강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제에 앞서 산업과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보존해 나갈 것인지’와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영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치열한 되물음이다.
헬로티 구서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