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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테인먼트7] 휴대용 콘솔,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급부상하며 시장 석권

  • 등록 2013.04.03 11: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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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콘솔 시대 개막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급부상하며 시장 석권

게임은 기술의 진보와 소비자의 욕구에 맞춰 진화를 거듭해왔다. 콘솔 게임기가 아타리 2600을 시작으로 가정에 새로운 가전제품으로 인식이 될 무렵, 미국의 학부모들은 게임에 대한 하나의 평가를 내렸다. 게임과 함께라면 아이들이 얌전해진다는 것. 이에 따라 가족 소풍이나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 집에서는 밖에서도 아이들을 얌전하고 안전하게 붙잡아 둘 수 있는 콘텐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서삼광 객원기자 (seosk@dailygame.co.kr)


새로운 문화 콘텐츠

아이들을 얌전하게 놀게 하고픈 고객의 욕구에 맞춰 개발된 최초의 휴대용 콘솔 게임기는 미국의 인기 스포츠 아메리칸풋볼(이하 미식축구)의 인기를 등에 업은 1977년 작 마텔 풋볼이다. 풋볼은 현대의 기준으로는 대용 콘솔 게임기로 분류하기에는 낮은 수준의 제품이지만 당시로서는 게임기 시장의 초창기였고, 간단한 입력으로 도출된 결과를 전기로 화면에 표시한다는 점에서 풋볼을 최초의 휴대용 콘솔 게임기로 분류하고 있다.
마텔 풋볼의 단순한 화면에 표현되는 미식축구 경기에 아이들은 매료되었고 부모들은 아이들과 함께 야외 활동(아웃도어)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미국은 영토가 넓은 이유로 이동 수단인 자동차가 발전한 것은 상식.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자동차 이동을 보다 안전하고 편하게 하기 위해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풋볼을 구매한 것이 휴대용 게임기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마텔은 풋볼의 인기에 이외에도 야구 게임 베이스볼, 미사일어택 등을 발매해 장난감 시장에서 앞서 나가기 시작했고, 완구 산업 경쟁사인 콜레코는 풋볼을 발전시킨 쿼터백(Electronic Quarterback)이란 게임기로 도전장을 내민다. 이 경쟁은 콜레코가 쿼터백을 300만 대 이상 판매해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성공 가능성과 함께, 이어질 콘솔 게임 역사에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제품이 좋아야 성공한다

마텔과 콜레코의 경쟁은 결과적으로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성공 가능성을 증명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따라 무수히 많은 업체들이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도전했지만 저조한 성과로 빠른 속도로 잊혀져 갔다. 휴대용 게임기의 카트리지 교환이라는 획기적인(당시로서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던 완구 업체 밀튼 브래들리(Milton Bradley)도 그 중 하나였다.
밀튼 브래들리는 비디오 게임보다 배고픈 하마(Hungry Hungry Hippos)라는 장난감으로 더 유명한 완구업체이다. 1979년 밀튼 브래들리는 마텔과 콜레코의 경쟁에 끼어들기 위해 카트리지 교환식 휴대용 콘솔 게임기라는 아이디어로 승부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로서는 휴대성과 내구성 등에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계기가 된다.
밀튼 브래들리가 출시한 마이크로비전(Microvision)의 문제점은 TV의 30분의 1 수준인 가로세로 16픽셀이라는 작은 화면으로 개발 가능한 게임은 극소수라는 점과 초기 LCD의 문제점이었던 내구성은 잦은 고장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손 꼽혔다. 게다가 휴대용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소프트웨어 카트리지는 약간의 정전기에도 데이터가 파괴되는 등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고장이 자주 발생하고 게임의 품질이 떨어지는 마이크로비전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식으로 매도되고 만다. 이후 밀튼 브래들리가 시도한 카트리지 교환식 휴대용 게임기의 아이디어는 10년 후 집적회로의 발달과 닌텐도의 철학이 만난 게임보이가 출시되면서 빛을 보게 된다.




1세대의 경쟁

아타리 쇼크로 인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게임 시장이 컴퓨터 중심으로 옮겨지면서 가정용 콘솔의 왕국이라는 명칭은 일본이 독차지 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회사가 닌텐도이다. 닌텐도는 가정용 콘솔뿐만 아니라 휴대용 콘솔 시장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콘솔 시장의 절대 강자로 떠오른다.
앞서 설명했듯이 닌텐도의 설계 철학은 아동용 완구를 중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즉, 완구와 같이 게임기도 저연령층이 사용하기 때문에 튼튼하고 간단한 게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닌텐도는 1980년부터 게임앤워치 시리즈를 출시한다.
버튼 2~3개로 조종하는 단순한 조작이 가능한 이 시리즈는 쏟아지는 적을 향해 대포를 발사하거나 과일을 안전하게 받는 등 아주 간단한 게임성을 바탕으로 몰입감 넘치는 게임을 담고 있었다.
이 제품의 개발을 담당하던 요코이 군페이는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직장인을 위해 개발한 이 게임기는 오히려 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게임회사 닌텐도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 요코이 군페이는 게임앤워치를 직장인의 정장 포켓에 딱 맞는 사이즈와 지하철 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눌리게 될 때를 대비해 튼튼하게 설계했다. 이때 액정 부분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위아래로 액정 화면이 달린 게임기도 만들게 되는데, 후에 이 아이디어는 닌텐도 DS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1980년 처음 등장한 게임앤워치는 이후 91년 까지 여러 시리즈로 발매되며 꾸준한 인기를 얻는다. 이때 동킹콩을 위한 컨트롤러를 새롭게 디자인 하던 중 콘솔 게임계 최고의 발견인 십자키가 탄생한 것 역시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게임앤워치로 등장한 게임들 중 동킹콩, 마리오형제, 벌룬파이트 등은 패미콤으로 이식되어 닌텐도의 성장에 밑거름이 됐다.




닌텐도의 선전포고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도 닌텐도는 게임앤워치와 패미콤의 성공으로 게임 시장에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했다. 지금의 닌텐도를 있게 한 게임기로는 패미컴뿐만 아니라 게임보이도 큰 역활을 했다.
닌텐도는 게임앤워치의 성공으로 카트리지 교환식 휴대용 게임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됐고, 게임앤워치를 개발한 요코이 군페이를 투입한 대규모 프로젝트의 결과로 1989년 4월 21일 게임보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게임보이는 계산기에 사용되던 액정화면을 개량한 STN 흑백 액정(단편 광판식 반사액정. 정면의 빛을 반사해 화면을 표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최첨단을 달리는 액정이었지만 지금 보면 시야각도 낮을뿐더러 빛의 양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초기 반응은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지금이야 신기한 물건이 아니지만 1990년도 당시에는 휴대용 게임기는 부의 상징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본과의 무역 단절 때문에 보따리 상인들에게 추가 금액을 내고 구입해야 하는 사치품이었고, 일본에서는 휴대용 게임기를 아주 비싼 장난감으로 치부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게임보이는 발매 초기에는 휴대용 패미콤이란 별명으로 불렸지만 비싼 가격과 부모들의 부정적 시각으로 인해 크게 성공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게임보이는 닌텐도 특유의 철저한 AS와 다양한 게임, 후속 기종의 끊임없는 개발로 전 세계 판매량 1억2000만 개(게임보이, 게임보이컬러)에 이르는 진기록을 세울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그렇다면 ‘게임보이’는 어떻게 해서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서 이런 성공을 거뒀을까?





닌텐도의 경영 철학

닌텐도는 카드 게임, 보드 게임을 비롯해 아동용 완구사업까지 장난감 사업의 대부분을 시도한 기업이다. 지금의 게임회사 닌텐도의 이미지는 1990년대 초중반 이후 생겨난 것.
이런 성장 과정을 가진 닌텐도는 많은 경영 철학 중 특이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제품은 튼튼해야 한다는 것. 지금은 우스갯소리로 노키아 휴대전화를 탱크에 비유하는 놀이 문화가 미국에서 유행중인데, 닌텐도 게임보이만큼은 탱크에 비유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내구성을 지녔다.
이런 닌텐도의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다. 1990년 걸프 전쟁 당시 한 미국 군인을 파병 길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게임보이를 소지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병사는 게임보이를 막사에 잠시 두고 작전을 수행하러 간 사이, 막사가 포격을 당해 불타버렸고 아무것도 회수 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훼손과 화제가 뒤 따랐다.
하지만 화재가 진압되고 정리를 하는 도중 눈에 띄는 한 물체가 있었다. 바로 극심한 화염 속에서 겉면이 녹아버린 게임보이였는 것. 이를 발견한 병사는 게임기를 작동시켰고, 결과는 놀랍게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는 후문이다.
일본의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게임보이 소프트웨어 팩을 불태우거나 기름에 튀겨도 정상적으로 작동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즉, 튼튼하고 휴대성이 좋은 장난감이라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된 것이다.
이런 닌텐도의 튼튼함을 강조한 제품 개발은 사실 게임앤워치가 큰 역할을 했다. 닌텐도의 히트 상품인 게임앤워치는 기술 부족으로 불량률과 파손율이 높았던 액정화면, 작고 가벼운 기기의 특징 때문에 빈번히 벌어지는 낙하사고 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후처리 발생 건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즉, 휴대용 게임기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애프터서비스로 인해 크게 깎여 나갔기 때문에 제품을 튼튼하게 만들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원동력 캐릭터

휴대용 게임기 시장은 튼튼함만으로 10년여에 가까운 세월 동안 독점 지배할 수 있는 만만한 시장은 아니다. 닌텐도 게임보이는 제품이 판매되는 중간에도 끊임없는 혁신과 주변기기 판매, 신기종을 출시하며 소비자의 요구에 맞는 제품을 개발해 인기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닌텐도 게임보이의 게임은 유선으로 연결해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능이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등장 초기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통신 기능은 하나의 게임을 만남으로써 크게 도약하게 됐다. 바로 포켓몬스터 시리즈이다.
포켓몬스터 시리즈는 닌텐도의 협력사인 게임프리크가 개발한 게임으로, 게임프리크 사장인 타지리 사토시의 6년여에 이르는 투자와 개발로 이루어진 명품 게임이었다.
포켓몬스터는 게임보이의 통신기능을 활용해 게이머가 소유한 포켓몬스터를 친구와 공유할 수 있어 10대 청소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특히 슈퍼패미콤으로 인해 게이머의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진 시기에 발매됐음에도, 게임보이를 꼭 사야 하는 게임기로 인식시킨 이유가 돼 버렸다.
아직도 일부 북미-유럽 게이머는 게임보이를 포켓몬스터 전용 기기로 알고 있다고 하니 이 게임의 인기를 반증하고 있다. 포켓몬스터로 인해 게임보이는 닌텐도 게임기의 특징인 게임 캐릭터가 판매량을 좌우한다는 것을 한층 더 확실히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닌텐도의 마스코트 격인 마리오가 게임보이에서는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타리의 재도전

한때 게임 시장의 지배자였지만 품질이 떨어지는 게임 때문에 몰락한 아타리도 1989년 휴대용 게임기 사업에 뛰어든다. 아타리는 아타리2600이후 벌어진 아타리 쇼크로 인해 출시하는 게임기마다 실패를 맛봐야 했다. 게임 시장의 왕좌를 되찾기 위해 아타리가 선택한 것이 휴대용 게임기 시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타리 왕좌 탈환작전의 시작으로 1989년도에 출시된 아타리 링크스는 세계 최초의 컬러 휴대용 게임기였다. 아타리 링크스의 특징은 컬러 액정 화면 채택 이외에도 PC엔진의 휴카드와 유사한 카드형 롬 방식 채택, 액정화면의 상하 반전(왼손 잡이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등이 있다.
하지만 아타리는 아타리 쇼크의 부정적인 인식과 휴대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본체 크기와 무게, 히트 게임의 부족으로 빠르게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특히 동 시대에 발매된 게임보이에 비해 적은 게임의 숫자까지 밀리면서 아타리의 자존심에 치명타를 날려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철수를 선택하게 되는 시발점이 돼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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