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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테인먼트6] SNES의 생과사…시대를 풍미한 SNES, 소니에 잡히다

  • 등록 2013.03.04 11: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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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ES의 생과 사[시대를 풍미한 SNES … 소니에 잡히다]

닌텐도는 경쟁 업체인 세가 보다 늦은 1990년 11월 21일 16비트 게임기 슈퍼패미콤(북미명 Super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SNES)을 출시했다. 닌텐도는 패미콤의 성공으로 자금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이는 하드웨어 개발에 대한 투자로 이어졌다. 슈퍼패미콤은 닌텐도가 자체 개발한 ‘리코5A22’ CPU를 이용해 화사한 그래픽을 표현할 수 있었다.

서삼광 객원기자 (seosk@dailygame.co.kr)


닌텐도는 슈퍼패미콤 판매 시 본체와 콘트롤러 2개를 2만5000엔(약 30만원)에 판매하고, 화면 접속 케이블과 전원 케이블은 별도로 판매했다. 당시 게이머는 슈퍼패미콤 본체와 소프트웨어만 구매하는 실수를 저질러 닌텐도에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슈퍼패미콤은 메가드라이브나 PC엔진, 16비트 게임과 유사한 수준의 스프라이트(객체 이미지) 색상 표현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드웨어였다.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스프라이트(캐릭터 1개로 이해하면 쉽다) 이미지가 128개에, 4개의 배경 레이어를 표현할 수 있었고, 이는 여러 개의 배경 레이어 스크롤 속도를 조정해 원근감을 표현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됐다.



슈퍼패미콤의 등장

게다가 가정용 콘솔 게임기 최초로 스프라이트와 레이어 투명도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2D 게임에 필요한 모든 기능은 슈퍼패미콤에서 완성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쟁사에서 이미 16비트 게임기들이 출시돼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을 무렵, 슈퍼패미콤은 이미 콘솔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하위 기종 패미콤(북미명 NES, Nintendo Entertainment System)과 호환을 목표로 개발 중이었다. 이미 확고한 시장 지배력을 가진 패미콤을 호환시켜야 신규 게임기의 판매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술상의 문제로 슈퍼패미콤은 독립적 콘솔 게임기로 개발 목표를 급하게 바꾸느라 기기가 가진 100%의 성능을 끌어들이지는 못 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한 가지 예로 대마계촌에서 주인공 아서가 황금갑옷을 입으면 사용할 수 있는 충전 기술을 사용할 때 게임이 느려지는 경우 등이다.
이외에도 슈팅 게임이나 액션 게임에서 화려한 효과를 사용하면 게임이 느려지는 문제가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일부 PC엔진과 메가드라이브 지지층은 슈퍼패미콤을 패미콤의 인기를 등에 업은 ‘운 좋은’ 게임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패미콤과의 호환성을 목표로 하다 보니 개발 언어가 기계어 중에서도 저급 언어(개발 및 수정이 힘들다)인 어셈블리를 사용했다. 닌텐도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서드 파티 업체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했다.




후발 주자의 전화위복

닌텐도는 패미콤으로 전 세계 콘솔 게이머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16비트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는 일본 전기 주식회사(Nippon Electric Company, 이하 NEC)의 PC엔진이나 세가의 메가드라이브에 밀려 후발주자로 전락하고 만다. 한 번에 게임기 1대 이상을 구매하기 힘들었던 당시 시대적 특성상 화려한 그래픽과 16비트 CPU 사용이라는 장점은 이미 빼앗긴 뒤였다.
또한 고성능 CPU와 그래픽 칩셋을 탑재한 메가드라이브는 빠른 스피드를 앞세운 액션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고, PC엔진은 슈팅 게임에 강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슈퍼패미콤은 앞서 설명한 설계 상의 문제로 이런 강점을 내세우기가 애매했다.
슈퍼패미콤은 하위 기종인 패미콤의 활약으로 이미 북미와 유럽지역에서 ‘게임=닌텐도’ 라는 공식이 성립할 정도였던 분위기와, 동시 발매 타이틀(런칭 타이틀)인 ‘F-ZERO’와 ‘슈퍼마리오월드’로 단숨에 인기 콘솔 등극하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앞서 이야기한 개발 상의 어려움이 닌텐도 인기의 비결이 된 것이다. 닌텐도와 협력하던 개발업체들은 슈퍼패미콤 용 게임 개발의 난해함을 해결하기 위해 패미콤의 게임들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일단 기술 개발력을 확보하기 위해 시리즈를 리메이크 하거나 정식 후속 편을 제작한 것이다. 이때 개발된 슈퍼혼두라, 슈퍼구울엔고스트(대마계촌), 슈퍼메트로이드 등 슈퍼패미콤 초창기를 함께 했던 게임들은 후발 주자인 슈퍼패미콤이 세계적 성공을 거두는 데 큰 역활을 하게 된다.
슈퍼패미콤은 기기의 문제점이 전화위복이 돼 초창기 소프트웨어 라인업의 화려함은 경쟁 기종인 PC엔진과 메가드라이브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화려함을 자랑하게 된다. 당시 여러 게임기를 동시에 가질 수 없었던 게이머들이 슈퍼패미콤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슈퍼패미콤은 최종적으로 전 세계 판매량 4910만 여대를 기록하기에 이른다(일본 판매량이 1717만 여대, 일본 외 시장에서 3193만 여대를 판매).

캡콤 날개를 달다

방아쇠(트리거) 형식 버튼은 슈퍼패미콤에서 처음 등장했다. 슈퍼패미콤 용 콘트롤러는 당시 게임기들의 버튼 수의 2배에 가까운 6개의 버튼이(십자키, 시작, 선택키 제외)가 장착 돼 어떤 기종보다 많은 버튼 수를 자랑했다.
6버튼 콘트롤러라는 작고 독특한 시도는 점점 품질이 높아지는 게임과 새로운 재미, 간편한 조작을 할 수 있어 게이머로부터 인기를 끌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다이아몬드 형 4버튼 배치 역시 슈퍼패미콤부터 시작되어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6버튼 콘트롤러의 최대 장점을 살린 것은 격투 명가 캡콤이다. 당시 아케이드 게임장(오락실)에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격투 게임 스트리트파이터2는 8축의 이동 방향과 6개의 버튼을 사용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스트리트파이터2의 조작체계를 완전히 이식할 수 있었던 것은 6버튼 콘트롤러를 가진 슈퍼패미콤뿐이다. 때문에 1992년 전 세계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스트리트파이터2는 콘솔 게임기 중 가장 먼저 슈퍼패미콤에 이식된다.
잠시 슈퍼패미콤을 잊고 당시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네오지오가 아케이드 게임을 가장 먼저 이식할 수 있는 기기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당연히 “스트리트파이터2가 슈퍼패미콤으로 처음 이식됐다고? 네오지오의 설명과 다르잖아”라는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네오지오는 어디까지나 MVS(Multi Video System) 기판을 사용하는 아케이드 게임을 위한 시스템으로 대부분의 오락실 용 게임이 이식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캡콤은 1988년 7월 자사의 게임에 특화된 아케이드용 기판 CPS(Capcom Play System)을 발매했다. 캡콤은 스트리트파이터2의 인기와 함께 파이널파이트, 천지를먹다 등 쟁쟁한 게임을 연이어 성공시켜, 아케이드 시장에 CPS 기판을 보급해 MVS 기판을 위협하게 된다. 즉, CPS 기판을 사용한 게임인 스트리트파이터2는 MVS 기판을 기반으로 하는 네오지오에 이식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슈퍼패미콤 용 스트리트파이터2는 닌텐도가 경쟁사를 따돌리는 데 앞장선 타이틀이다.
비록 뒤늦게 세가와 NEC가 스트리트파이터2의 이식과 게이머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추가 버튼을 장착한 콘트롤러를 판매했지만 격차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어지고 만다.
슈퍼패미콤 용 스트리트파이터2는 주목할 만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에서만 100만장이 넘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판매량 670만장을 기록하며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판매량을 기록했다. 어쩌면 이 기록 때문에 아케이드 게임에 주력해 온 캡콤이 본격적으로 콘솔 시장을 공략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계를 극복하라

지난 연재에 잠시 이야기 했던 슈퍼패미콤의 한계에 대해 이번 시간에 좀더 자세히 다뤄보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슈퍼패미콤은 패미콤과 연동을 기반으로 기획되어 제작되다가, 급하게 단독 플랫폼으로 변경된 기체이기 때문에 설계상에 실수가 다수 존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닌텐도가 빼어든 카드는 롬팩 내에 보조 연산 장치를 삽입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흔히들 듀얼코어, 쿼드코어로 표현하는 CPU 기술과 유사하다. 1990년대 사용되던 듀얼 CPU(두개의 CPU를 장착해 연산을 분산시키는 것. 듀얼코어는 하나의 CPU에 연산 장치를 여러 개 장착한 것)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런 조치는 게임의 품질에 대해서는 득이 됐으나 가격 면에서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1994년 이후 롬팩 하나의 가격이 1만엔(약 14만원)을 넘어서더니 1995년 이후에는 롬팩의 평균 가격이 1만엔을 넘어설 정도로 고가의 게임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슈퍼패미콤 본체의 가격이 2만5000엔(약 32만원) 이었던 점을 고려했을 때 매우 비싼 가격이었다.
닌텐도는 롬팩의 가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6년 초 롬팩의 가격 상한선을 7800엔(약 11만원)으로 동결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32비트 게임기에 대한 소식과 출시 일에 대한 기대감이 게이머들 사이에서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판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또한 7800엔이란 가격 역시 이후 차세대 게임기의 광 디스크(CD) 게임의 가격 5200엔이 비하면 매우 비싼 수준이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시장을 지배하던 닌텐도가 롬팩의 가격을 고가로 생성하자 중고 게임 거래 시장이 활성화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고가 롬팩 정책은 현재 칼라파고스화 되어가는 일본 게임 시장에서도 문제점으로 지적 받는 중고 시장을 활성화시켰다.
199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일본은 거품 경제(버블 경제) 시기와 맞물리면서 폭발적 성장했었고, 일만 해준다면 연봉은 얼마든지 내겠다는 풍토가 조성될 만큼 돈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1만엔 정도로 책정된 게임 가격은 아주 ‘저렴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96년 이후 일본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고, 게임을 구매하기 힘들어진 소비자들은 중고 게임을 찾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자. 바로 소프트웨어 중고 시장의 특수성이다. 게임과 같은 소프트웨어는 중고와 신품은 가격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품질 면에서는 동일한 중고 가치가 뛰어난 상품이다. 때문에 비싼 신품보다는 조금 늦게 하더라도 중고로 저렴하게 게임을 구매하는 게이머들이 늘기 시작했고, 일부 게이머는 중고 팩에 세이브 데이터(롬팩 자체에 세이브 파일을 위한 롬이 들어있기 때문에)가 들어있는 게임을 더 선호해 일부러 중고를 찾는 기 현상이 벌어질 정도였다.




소니, 게임에 빠지다

슈퍼패미콤 탄생의 뒷 배경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꽤 있다. 닌텐도의 하드웨어 제작 파트너 였던 소니가 게임 산업을 단독으로 진행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소니는 워크맨과 휴대용 CD플레이어 등으로 음성 재생기기에 특화된 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기술을 바탕으로 닌텐도가 슈퍼패미콤을 개발할 때 ‘소니 SPC700 & DSP’라는 사운드 칩셋을 사용하게 된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개발 초기 닌텐도는 메가드라이브가 사용하는 FM음원(특정 주파수를 가지는 소리를 합성해 출력하는 방식) 사운드 칩셋을 슈퍼패미콤에 사용하려 했다. 후일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는 쿠다라기 켄의 강력한 요청으로 PCM(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저장해 소리를 출력하는 방식. FM방식에 비해 음질이 뛰어나다)을 탑재하게 되고 메가드라이브와 차별화 되는 음질로 게이머들의 호평을 받게 된다.
사운드 칩셋으로 시작된 닌텐도-소니의 공동 개발 노선은 양사에 신뢰 관계를 쌓기에 충분한 성과를 거뒀다. 이를 시작으로 소니는 슈퍼패미콤에 추가로 장착되는 광 디스크(Optical Disk) 기반 게임기를 추가로 개발했으나 출시는 하지 못했다.
소니의 쿠다라기 켄이 닌텐도와 1990년 1월 슈퍼패미콤 사운드 칩셋 공급과 함께 광 디스크를 매체로 사용하는 게임기를 개발하기로 계약을 체결했지만, 닌텐도 최악의 실수 중 하나인 CD-ROM 드라이브를 무시하는 경영진의 판단 실수로 계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또한 닌텐도는 향후 광 디스크 기반 게임기를 출시하는 필립스와 업무 제휴를 비밀리에 진행하면서(이 계약은 소니를 견제하기 위해 필립스와 짜고 친 거짓 제휴였다!) 실수를 연발하기에 이른다.
닌텐도와 소니, 필립스의 삼각관계는 1991년 여름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일렉트로닉쇼에서 소니가 닌텐도와 제휴 게임기를 발표한 다음날, 닌텐도가 이것을 부정하고 필립스와 관계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면서 소니에 큰 피해를 입히게 된다. 지금이야 일본 게임 업계에서 어깨를 나란히 대표적인 기업인 소니와 닌텐도이지만 당시에는 닌텐도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닌텐도-소니 연계 업무와 CD-ROM 기반 콘솔 게임기 개발 업무를 담당하던 쿠다라기 켄은 소니 독자적인 게임산업 진출을 결정한다.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32비트 차세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 편에서 다루겠다.

방송통신사업자로 변신 시도

닌텐도가 설립 초기에는 완구나 포커나 화투 게임용 카드를 만드는 회사였다. 1990년대 일본 거품경기와 세계적 호황기에 맞물린 닌텐도 황금기에는 사업분야가 공격적으로 확장되던 시기기도 하다.
많은 닌텐도 게임 마니아들은 이런 닌텐도의 공격적인 부분을 좋아한다. 닌텐도는 1995년 ‘사테라뷰’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방송 위성을 통한 콘텐츠 시장을 선점하려는 시도를 시작한다.
사테라뷰는 새털라이트 뷰(Satella View)의 일본식 발음으로, 인공위성으로 전송된 방송신호를 통해 지금의 케이블 TV와 유사한 방송 콘텐츠는 물론, 게임을 다운로드받아 할 수 있는 기기였다.
사테라뷰가 사용하는 방송 영상과 게임데이터는 BS(Broadcast Satellite)로 일본 전역에 송신되었으며 게이머들은 방송시간에 맞춰 게임을 다운받아 플레이할 수 있었다. 물론 위성방송을 이용하는 구조라 독자적인 음악 방송이나 라디오 프로그램도 함께 방송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사테라뷰의 가격이 1만8000엔으로 고가품이었던 데다가 방송 콘텐츠의 품질이 낮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가장 중요한 BS 사테라뷰 게임이 그다지 제작되지 않았고, 특히 BS용 타이틀 파이어엠블렘의 경우 카트리지에 게임 데이터가 저장되기는 하지만, 방송 시간외에는 플레이를 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점을 들어내며 게이머의 철저한 외면을 받게 된다.

슈퍼패미콤 시대, 막을 내리다

한시대를 풍미한 닌텐도 슈퍼패미콤. 콘솔 게임을 대표하는 회사인 닌텐도를 지금의 반석에 올려놓은 이 게임기는 결국 차세대 게임기의 거센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2003년 공식적인 판매를 중지하게 된다.
닌텐도의 슈퍼패미콤 판매 중단은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이 등장한 1995년 이후 판매량이 급감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슈퍼패미콤은 차세대 게임기(32비티 게임기 세가 새턴, 소니 플레이스테이션)가 생산과 유통의 문제로 전 세계에 보급되기 전까지는 현역 게임기의 위치를 굳건히 하며 최후의 불꽃을 피웠다. 이때 캡콤은 아직까지도 게이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스트리트파이터:제로2’를 슈퍼패미콤으로 완벽 이식하는 기행(슈퍼패미콤의 성능상 아케이드 격투게임의 완벽이식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을 저지른다.
슈퍼패미콤은 공식 판매가 중지된 2003년 이후에도 AS는 공식적으로 진행되었지만, 2007년 닌텐도가 패미콤과 슈퍼패미콤의 AS 신청이 전무해 더 이상의 수리 서비스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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