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전쟁 장기화가 원유와 비료, 헬륨 공급을 동시에 흔들며 세계 경제 침체 우려를 키우고 있다.
AP통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걸프 산유국들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수출 길이 막히자 쿠웨이트와 이라크를 포함해 원유 생산을 감축했다. 이에 따라 하루 2천만 배럴 규모의 공급이 사라져 국제에너지기구는 글로벌 석유 시장 역사상 "가장 큰 공급 차질"이라고 평가했다. 브렌트유 가격은 전쟁 직전 배럴당 약 70달러 수준에서 3월 28일(현지 시간) 3.4% 상승한 105.32달러에 마감했고, 미국 서부텍사스유는 5.5% 뛰어 99.64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석유 가격 급등은 글로벌 경기 침체 공포를 자극하고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의 크리스토퍼 니텔(Christopher Knittel) 교수는 역사적으로 이 같은 유가 충격이 세계적 경기후퇴로 이어져 왔다고 지적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카르멘 레인하트(Carmen Reinhart) 전 세계은행(World Bank)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인플레이션 상승과 성장 둔화가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기타 고피나트(Gita Gopinath)는 최근 분석에서, 전쟁 이전 올해 3.3%로 예상됐던 세계 성장률이 2026년에 유가가 배럴당 85달러 수준을 유지할 경우 0.3~0.4%포인트 낮아질 수 있다고 밝혔다.
전쟁은 비료 공급망에도 직접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페르시아만 지역은 요소와 암모니아 등 핵심 비료 수출의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 지역 생산자들은 질소 비료 원료인 저가 천연가스를 쉽게 확보하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 질소 비료 수출의 최대 40%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이동해 왔지만, 통로가 막히면서 요소 가격은 전쟁 이후 50%, 암모니아 가격은 20% 각각 상승했다.
비료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타격이 크다. 알파인 매크로(Alpine Macro)의 상품 전략가 켈리 쉬우(Kelly Xu)는 코멘터리에서, 비료의 85%를 수입에 의존하는 브라질이 특히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이집트는 비료 생산국이지만 생산에 필요한 천연가스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할 경우 공장 가동이 위축된다. 비료 가격 상승은 농가가 사용량을 줄이게 만들어 수확량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고, 결국 식품 가격을 끌어올려 공급을 줄이며 저소득 국가 가계에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헬륨 공급도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천연가스 공급 교란 속에서, 천연가스 부산물인 헬륨은 반도체 생산과 로켓, 의료 영상 장비 등에서 필수 재료로 쓰인다. 카타르는 라스 라판(Ras Laffan) 시설에서 헬륨을 생산하며 전 세계 공급의 3분의 1을 담당해 왔는데, 이 지역 공급망이 타격을 입으면서 관련 산업 전반에 여파가 확산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의 파티 비롤(Fatih Birol) 사무총장은 3월 23일(현지 시간) 발언에서, 현재 위기가 현 방향으로 이어질 경우 어느 나라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경고했다. 달라스 연방준비은행 산하 에너지·경제센터를 이끄는 루츠 킬리안(Lutz Kilian) 소장은 남은 원유와 천연가스를 두고 수요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저소득 국가가 입찰 경쟁에서 밀리며 가장 큰 에너지 부족을 겪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 세계적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80% 이상이 아시아로 향해 왔다는 점에서 아시아 지역의 노출도는 특히 높다.
아시아 각국은 긴축 조치를 잇달아 시행하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위해 정부 부처 운영을 주 4일로 축소하고, 공무원들이 사용하는 냉방기 온도를 24도(화씨 75도) 이하로 낮추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태국에서는 공공 부문 직원들에게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인도는 조리용으로 쓰이는 액화석유가스(LPG)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수입하는 국가로, 정부는 한정된 물량 배분에서 가계에 기업보다 우선순위를 주고 가격 인상의 상당 부분을 떠안아 저소득층 부담을 줄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LPG 부족은 인근 자영업과 외식업에도 직접적인 압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부 음식점은 영업 시간을 단축하거나 한시적으로 문을 닫고 있다. 또 많은 연료를 쓰는 커리나 튀김류 메뉴를 줄이는 사례도 늘어나는 상황이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공무원 차량 이용을 제한하고, 1990년대에 폐지됐던 연료 가격 상한제를 다시 도입해 가격 급등을 억제하고 있다.
세계 최대 경제국인 미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일정 부분 방어막을 갖추고 있다. 미국은 원유 수출국이어서 자국 에너지 기업들이 유가 상승의 이익을 일부 누릴 수 있다. 또 LNG 수출 설비가 이미 100% 가동률에 도달해 추가 수출이 불가능한 탓에, 미국 내 가스 물량이 국내에 머물면서 공급이 풍부하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다.
그럼에도 미국 소비자들은 높아진 휘발유 가격에 부담을 호소하고 있다. 자동차 협회 AAA에 따르면 한 달 전 갤런당 평균 2.98달러 수준이던 미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최근 거의 4달러에 근접했다. 무디스 애널리틱스(Moody's Analytics)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크 잔디(Mark Zandi)는 동료들과 함께 작성한 코멘터리에서, 주유소 가격 상승만큼 소비자 심리에 무겁게 작용하는 요인은 없다고 분석했다. 잔디는 이런 연료비 충격이 이미 생활비에 지친 가계에 심리적 타격을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경제의 기초 체력은 이미 약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9월까지 연율 4.4%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던 미국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10월부터 12월 사이 연율 0.7%로 둔화했다. 고용시장도 예상 밖 약세를 드러내, 2월에는 일자리 9만2천 개가 순감소했고 2025년 들어 월평균 신규 고용은 9천7백 개에 그치며 2002년 이후 경기침체 시기를 제외하고 가장 부진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컨설팅 기업 EY-파르테논(EY-Parthenon)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그레고리 다코(Gregory Daco)는 향후 1년 내 미국이 경기침체에 빠질 확률을 40%로 상향 조정했다. 통상 경기 여건이 정상적일 때 침체 확률이 15% 수준으로 추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위험 상승이다. 다코는 에너지 충격과 성장 둔화, 고용 부진이 맞물린 현 상황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의 하방 리스크를 키우고 있다고 진단했다.
헬로티 이동재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