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전 세계 산업에는 ‘지속가능성’ 광풍이 불고 있다. 여기에는 친환경 요소가 주를 이루는데, 이는 저탄소 나아가 탈탄소를 향한 지속적인 약속에 의거한 움직임이다.
완성차 업계도 이에 대응해 ‘전동화’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완성차 브랜드는 이제 너 나 할 것 없이 ‘엔진(Engine)’에서 ‘모터(Motor)’로 자동차 동력을 전환하는 추세다. 특히 ‘대배기량 고성능 내연기관 엔진’을 브랜드 핵심이며 철학으로 여겼던 슈퍼카 업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자동차 시장에 진정한 파란이 일고 있다는 방증이자, 과도기를 넘어서 변혁이 진행 중인 자동차 시장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완성차 업계는 이런 흐름 속에서 한때 주력 모델로 손꼽혔던 ‘자식 같은’ 모델의 단종을 선언하고 나섰다. 업계에는 ‘판매 실적 저조’에서 ‘수익 저하’로 이어지는 시장경제 원리에 따른 움직임으로 분석하는 시각부터 전동화를 주된 이유로 지목하는 시각까지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단순한 단종으로 향한 모델도 있지만, 단종 후 전동화 기술을 입고 재탄생을 예고한 모델이 있다는 게 관전 포인트다.
이번 ‘오토 스페션 I’에서는 지난해부터 시작된 국내 완성차 및 해외 완성차 국내 법인 브랜드의 단종 확정·예정 및 단종설에 휩싸인 모델에 대해 다룬다.
기아 효자 라인업 ‘K 시리즈’의 아픈 손가락 ‘K3·K9’
기아는 2006년 디자인 혁신을 목표로 피터 슈라이어(Peter Schreyer)를 최고 디자인 책임자(CDO)로 영입하며 변화의 기반을 다졌다. 이를 추진력 삼아 2009년 K7 출시를 시작으로, 중형 세단 ‘로체(LOTZE)’ 후속 모델인 K5를 출시해 K시리즈 성공시대의 서막을 올렸다. 기아는 여기에 탄력받아 2012년 한해에 소형 세단 K3와 대형 세단 K9을 줄지어 내놓으며 K 시리즈 라인업을 완성했다. 바야흐로 ‘패밀리룩’의 탄생이었다.
K 시리즈는 2014년 기준 전 세계 누적 판매 220만 대를 넘어서며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이후 K 시리즈 탄생 10주년을 맞은 2020년에는 총 550만 대 판매 기록을 달성하며 시리즈의 공고함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던 2020년 'K 4형제'는 자동차 시장에 갑자기 불어닥친 전동화 트렌드와 국내 SUV 선호 현상 등에 밀려 부진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꾸준한 판매고를 올리며 ‘K 시리즈 가장’으로 평가받은 K5를 제외하고 나머지 3개 모델의 판매량 저조 현상은 지속됐다. 여기에 기아는 시장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2021년 사명 및 CI(Corporate Identity, 브랜드 로고) 변경을 필두로 K 시리즈 맏형격인 K7을 K8으로 변경하는 강수를 두며 변화를 알렸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기아는 지난해 K8이 2022년 5월 기준 국내 하이브리드 차량 판매 순위에서 3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2위 그랜저 대비 판매량 차이가 1000대도 나지 않을 만큼 판매량 측면에서 성장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올해도 이 흐름은 계속됐다. 자동차 매체 모터그래프에 따르면 K8은 올해 6월 국산차 판매량 4469대를 기록하며 판매 순위 9위를 차지했다. 1위를 기록한 경쟁 상대 현대 그랜저와 비교해 순위상 차이가 드러나는 통계지만, 기아 내 세단 판매량에서 선두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또 국내 브랜드 통합 세단 판매 순위에서도 현대 그랜저·현대 아반떼·제네시스 G80에 이어 4위라는 호성적을 거두며, SUV 광풍에서도 분전했다.
반면 K3·K5·K9은 2023년 6월 모터그래프 국산차 판매 통계 내 판매 순위 부문에서 각각 21·27·41위를 기록하며 판매량 저조 상황이 지속됐다.
특히 K3와 K9은 각각 1540대와 366대가 팔렸는데, 이는 전년 대비 각각 4.3%, 19.2% 하락한 수치다. 양 모델은 2021년 9월 이후 단 한 번도 판매량 10위권에 들지 못하면서 사실상 경쟁에서 뒤쳐진 모양새를 이어갔다. 이에 업계 전문가들은 양 모델의 경쟁 모델인 현대 아반떼와 제네시스 G90의 건재함과 더불어 K3·K9의 변화 부족을 판매 부진 근거로 뽑는다.
이에 업계에서는 K3와 9K의 단종설을 재기하고 나섰다. 풀체인지(완전 변경) 주기를 코앞에 둔 양 모델이 결국 단종 수순을 밟고 있다는 추측이다. 이와 관련해 K3는 해외에서 판매량이 지속되고 있기에 국내 단종 후 해외 판매는 지속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최근 몇 년 간 양 모델의 판매량 추이를 보면 이런 전망도 무리한 분석이 아니라고 평가된다. 여기에 기아 측은 “양 모델 단종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고성능 라인업에 ‘전동화’ 입혀 새 자리 마련한 현대차·기아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는 각자 고성능에 초점을 맞춘 서브 및 독립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벤츠(Mercedes-Benz) 메르세데스-AMG, BMW M GmbH, 스텔란티스 SRT(Street and Racing Technology), 아우디 RS(Renn Sport) 등이 이에 해당된다.
람보르기니 우르스 퍼포만테(Urus Performante)·마세라티 트로페오(Trofeo)와 같이 자사 기존 모델에 고성능 색깔을 입힌 트림 및 파트가 있는 반면, 쉐보레 콜벳(Corvette)·닛산 GT-R(Grand Turismo-Racing) 등 고성능 모델이 존재하기도 한다.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와 기아도 각자 고성능을 표방한 브랜드 및 모델을 배치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 2015년에 고성능 서브 브랜드인 ‘현대 N’을 브랜드 라인업에 추가해 운영 중이고, 기아는 고성능 스포츠 모델인 ‘스팅어(Stinger)를 출시했다.
현대차는 2020년 3도어 준중형 해치백 모델 ’벨로스터(Veloster)’ 생산 중단 및 단종을 발표한 데 이어, 2018년에 출시한 ‘벨로스터 N(Veloster N)’까지 단종을 확정지으며 벨로스터 11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대신 2021년 출시된 준중형 세그먼트 아반떼 7세대(Avante CN7)의 N 모델인 '아반떼 N(Avante N)'이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됐다. 이와 관련해 현대차는 이달 26일 ‘더 뉴 아반떼 N(The New Avante N)’을 출시하며, N 브랜드 대표 모델로 평가받는 아반떼 N의 위치가 공고함을 천명했다.
한편 기아는 지난 1996년 출시부터 1999년 생산 중단까지 활약한 고성능 스포츠 모델 ‘엘란(Elan)’의 고성능 DNA를 계승한 스팅어를 지난 2017년에 내놨다. 출시 이후 2019년까지 꾸준히 판매량 정점을 찍으면서 호조세를 기록하다, 그 이후부터 지속적인 판매량 감소 추세를 보이며 단종 수순을 밟았다. 결국 지난 4월 생산이 중단되며 출시 6년 만에 사실상 단종된 후, 지난달에는 재고 물량이 소진된 탓인지 모터그래프 통계 기준 판매량 한 대를 기록했다.
업계는 지난해 출시된 EV6 고성능 모델 ‘EV6 GT(The Kia EV6 GT)’가 스팅어의 후속작이라 평가했다. 기아는 향후 차세대 전기차 플랫폼 ‘eM’을 기반으로 한 고성능 스포츠 전동화 세단 프로젝트명 ‘G1’ 개발을 지난달 공지했다.
이로써 현대차·기아는 ‘서브 브랜드 지속’과 ‘전동화 전환’을 각자 고성능 전략으로 설정하며 사업을 진행하기로 한 모양새다.
‘벌써?’ 단종된 전동화 모델
완성차 업계는 ‘100% 전동화’를 목표로 순항 중이다. 이 배경에서 프랑스 완성차 브랜드 르노(Renault)가 지난 2012년에 출시하고, 2017년에 국내 첫 판매를 시작한 초소형 전기 모델 ‘트위지(Renault TWIZY)’ 단종을 발표했다.
트위지는 도시형 콤팩트 전기 자동차를 표방해 탄생한 전기 모델로, 르노는 지난 7월 트위지를 최종적으로 단종한다고 밝혔다. 르노에 따르면 트위지는 오는 9월 최종 물량 생산 이후 단종될 전망이다.
르노 자회사 ‘모빌라이즈(Mobilize)’는 2024년 중반을 목표로 트위지 후속 모델 ‘모빌라이즈 듀오(Mobilize Duo)’를 개발 중이다. 모빌라이즈는 이미 지난해 10월 파리에서 개최된 ‘2022 파리 모터쇼’를 통해 듀오를 공개했다. 이 자리에서 1인승 전기차 모델 ‘리모(Limo)’와 순수 전기 모델 솔로 콘셉트(Solo Concept) 등도 함께 선보였다.
완성차 업계는 시장 경제 체제에서 필연적인 ‘제품 단종’ 측면에서도 ‘전동화’를 솔루션으로 제시하고 있는 양상이다.
헬로티 최재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