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즈업] 위기에서 전략산업으로…한국 소부장 체질이 바뀐다

2025.12.20 10:20:50

임근난 기자 fa@hellot.net

글로벌 ‘공급망 재편’ 경쟁 속, 한국이 선택한 기술·시장·생태계 삼각 전략

중소기업의 격차를 줄이는 10대 협력모델…생태계 중심 전략으로의 전환

 

대한민국 소·부·장 산업이 다시 한 번 거대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AI 기반 제조혁신, 디지털·그린 전환, 미·중 기술 패권 경쟁 등 산업지형의 변화가 심화되면서 핵심 기술의 자립화와 글로벌 진출 전략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 됐다. 정부가 제시한 새로운 소부장 경쟁력 강화 기본계획은 ‘위기 대응형’에서 ‘미래 선도형’으로 패러다임을 바꾸고, 기술-시장-생태계를 하나로 묶는 총체적 산업 전략을 제시한다. 본 기획기사에서는 이번 계획의 핵심을 산업 현장의 언어로 풀어내고, 국내 제조업이 직면한 구조적 도전을 어떻게 기회로 전환할 것인지 심층 분석한다.

 

 

글로벌 산업지형 변화, 위기가 아닌 ‘구조전환의 신호’

 

세계 주요국이 전략산업 중심의 자국 공급망을 강화하면서 글로벌 경쟁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은 반도체·배터리 보조금과 규제 완화를 결합한 산업 패키지를 제시했고, 유럽연합은 반도체 및 핵심 제조분야에서 장기 투자 계획을 실행 중이다. 일본은 고난도 반도체 제조기술 확보를 위해 생산 보조금과 연구개발 투자를 동시에 늘리고 있다.

 

여기에 중국의 제조업 상향 전략까지 더해지면서 핵심 품목의 기술 확보 경쟁은 단순한 ‘혁신 경쟁’을 넘어 ‘공급망 생존 경쟁’으로까지 번졌다. 특히 첨단 생산기술, 공정·장비 국산화, 핵심 소재 자립 등은 어느 국가도 양보할 수 없는 전략축이 되었다.

 

한국 소부장 산업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더 이상 기술 추격전만으로는 경쟁력을 지키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내 한국 기업의 실질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기술·시장·수요망이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 이번 전략의 핵심 배경으로 작용한다.

 

소부장 산업의 현실 진단: 성장했지만 불안정한 균형

 

지난 몇 년간 소부장 산업은 위기 대응을 넘어 외형적 성장까지 이뤄냈다. 핵심 품목 중심의 기술개발과 기업 지원이 이어지면서 자립화율이 뚜렷하게 개선됐고, 중견·대형 기업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 점유율도 확대됐다. 수출 규모 역시 빠르게 증가해 소재·부품·장비 모두에서 호조세가 나타났다.

 

그러나 성장의 이면에는 한계도 공존한다. 우선 수출 구조가 특정 지역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어 공급망 충격에 취약한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다. 세계 각국의 규제 도입· 무역 장벽·현지 생산 기조 강화는 한국 기업에 직접적인 리스크로 작용한다.

 

또한 산업 생태계 내부에서도 불균형이 지속된다. 대기업 중심의 R&D와 테스트 인프라가 빠르게 고도화되는 반면, 많은 중소 공급기업은 기술개발·인증·양산 역량에서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공급망의 최전선에서 경쟁을 수행하는 기업이 규모와 역량의 한계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전체 산업의 경쟁력도 구조적으로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새로운 전략은 단순히 ‘대체 품목 개발’이나 ‘개별 기술 국산화’가 아니라, 생태계 전반의 성장 구조를 재설계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

 

 

AI 기반 신기술 개발과 고난도 공정 역량 확보

 

대한민국 소·부·장 산업이 맞이한 새로운 도전의 중심에는 ‘기술 혁신’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기존에는 특정 품목의 대체기술이나 국산화가 주요 과제였다면, 새로운 전략에서는 개발 방식 자체를 혁신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AI 기반 제조혁신은 기술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가장 근본적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기업들은 AI를 활용해 방대한 데이터 기반의 소재 탐색과 공정 최적화를 시도하고 있으며, 정부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AI 실험실과 디지털 트윈 기반 공정 개발 인프라를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신소재 개발 기간을 대폭 줄일 뿐만 아니라 고난도 공정의 정확도와 생산 수율까지 높이는 효과가 기대된다.

 

동시에 반도체·디스플레이·미래 모빌리티처럼 기술장벽이 높은 분야에서는 핵심 장비와 공정기술의 국산화가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다. 재활용·절감·재사용을 기반으로 하는 친환경 기술 역시 제조업의 필수 역량으로 부상하며, 글로벌 규제 대응과 지속가능한 생산체계를 동시에 강화하는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결국 기술 혁신 전략은 단순한 연구개발이 아니라 ‘미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기술 체제’를 새롭게 구축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글로벌 공급망 진입과 맞춤형 수출 전략

 

기술 혁신과 함께 시장 진입 전략도 대폭 확장됐다. 소부장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 국면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하려면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는 해외 프로젝트 연계형 수출 전략, 주요국별 맞춤형 진입 공략, 글로벌 바이어 매칭 프로그램 등 다층적인 시장 지원 체계를 마련했다. 특히 미국·유럽·일본 등 전략적 파트너 국가에서는 대규모 산업 프로젝트와 연계한 공급망 진입 지원이 강화되고 있다. 반도체·조선·에너지·친환경 산업에서 필요로 하는 핵심 기술과 장비를 국내 기업이 수출하거나 합작 형태로 진입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또한 동남아·인도 등 신흥국은 장기 생산거점 확충지로 주목받고 있으며, 현지화를 결합한 공급망 다변화 전략이 병행되고 있다. 수출상담회 확대, 빅바이어 중심의 협상력 강화 프로그램, 기술 인증·평가·테스트를 묶은 패키지 지원 등은 중소·중견기업의 글로벌 진입 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시장 혁신 전략의 목적은 명확하다. 한국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의 주변부가 아니라 ‘핵심 노드’로 자리잡도록 돕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이 함께 성장하는 구조적 개편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생태계 전략이다. 기존의 ‘단일 기업 중심 개발’이 아닌, 수요기업·공급기업·연구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10대 협력모델이 제시되었다. 이는 기술개발–테스트–양산–수출까지 전주기를 패키지로 묶는 방식으로, 독자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던 중소 공급기업에게 실질적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장비·부품·소재가 하나의 가치사슬을 이루는 협력모델은 반도체·디스플레이·모빌리티 등 고난도 산업에서 빠르게 확산될 전망이다. 생태계 혁신 전략이 제대로 안착하면, 그동안 반복되던 '대기업 중심 성장–중소기업 정체'라는 구조적 한계를 실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향후 10년, 한국 소부장 산업의 새로운 질서를 향해

 

이번 전략은 단순히 과거의 위기 대응을 정교화한 수준이 아니다. 소부장 산업을 국가 전략산업의 중심축으로 재정의하고, 기술–시장–생태계를 하나의 구조로 엮어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장기적 계획이다.

 

앞으로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좌우할 요소는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고난도 기술 확보 △AI 기반 제조혁신 △지속가능·친환경 공정 전환 △공급망 다변화 △수요·공급기업의 동반 성장 모델 구축이 이에 해당한다.

 

한국 소부장 산업은 이제 더 이상 ‘대체 기술을 찾는 산업’이 아니다. 미래 제조업의 혁신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플레이어이자, 글로벌 공급망 경쟁의 전면에 서 있는 전략적 산업이다.

 

헬로티 임근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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