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시크의 저가형 인공지능(AI) 모델의 등장으로 고대역폭 메모리(HBM) 수요 확대 등이 예상되는 가운데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가 더욱 강력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의 추가 제재가 중국산 HBM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만큼, 전 세계 HBM 시장 1·2위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셈법은 더욱 복잡해지게 됐다. 2일 업계와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딥시크와 AI 칩 수출 통제 강화 등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의 회동은 '딥시크 쇼크'가 지속하는 데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중국 반도체 수출 추가 규제를 검토하는 중에 이뤄져 관심을 모았다. 세계 반도체의 절반을 소비하는 중국에 공을 들이는 엔비디아를 향한 추가 제재가 예상되는 만큼,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황 CEO가 직접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관련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최근 딥시크가 발표한 최신 추론 AI 모델 'R1'의 개발 비용은 557만6천달러(약 80억원), 약 2천개의 중국용 엔비디아 AI 가속기 'H800'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H800에는 최신 제품인 5세대 고대역폭 메모리 'HBM3E'가 아닌 HBM2E(3세대) 또는 HBM3(4세대)가 탑재되고, 국내 업체들이 공급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빅테크들이 한 개의 AI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한 해 동안 투자하는 비용과 채용하는 칩 개수를 비교하면 10%에도 미치지 않고, 성능도 경쟁사들과 맞먹거나 뛰어넘는 것으로 알려져 업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딥시크 쇼크로 엔비디아 주가가 하루 만에 5천890억 달러(약 850조원)가 증발하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엔비디아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을 H20의 저사양 칩까지 확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앞서 엔비디아는 미 정부로부터 2022년 당시 가장 강력한 AI 칩인 H100의 중국 판매 제한을 받았고 이어 2023년에는 H800 수출도 제한됐다. 이에 엔비디아는 지난해 H20을 출시했다.
문제는 미국의 추가 제재가 중국 업체들의 자립도를 높여 차세대 HBM 개발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지난해 중국 메모리 업체 CXMT(창신메모리)가 최신 D램 DDR5를 시장에 내놓거나, 2023년 9월 화웨이가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 7나노 공정에서 제조된 칩셋을 최신 스마트폰에 탑재하는 등의 사례만 봐도 미국 규제가 역으로 중국 반도체 성장을 촉진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취임 초기인 만큼 저사양 제품에 대한 대중국 제재도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며 "중국 CXMT가 현재 HBM2E까지 만들고 있는데 중국 반도체 업체들의 자립화를 부추겨 향후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에 CXMT 제품이 쓰일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현재 국내 업체들보다 HBM에서 두 세대 이상 뒤처진 중국 업체들이 HBM3 양산을 본격화하면 엔비디아 GPU에 탑재될 수 있고, 나아가 중국이 HBM3E, HBM4를 만드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분석이다. 이렇게 되면 현재 HBM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국내 업체들의 HBM 공급 물량이 줄어드는 등 중국 업체의 추격을 허용할 수 있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는 "딥시크의 주장이 맞는다면 앞으로 낮은 수준의 AI 반도체로도 충분히 AI 모델을 만들 수 있게 된다"며 "이렇게 되면 (중국 등) HBM 후발 주자들과 선발 주자와의 격차는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행보도 이러한 가능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 황 CEO는 지난달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아마존, 메타, 애플 등 빅테크 수장들과 달리 중국을 방문해 약 일주일간의 일정을 소화해 의문을 자아냈다. 미중 갈등 상황에도 중국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이는 엔비디아가 중국에 자사 제품 판매를 확대하는 동시에 미래에 중국 업체와 협력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딥시크에 저사양 칩이 실제 얼마만큼 사용됐는지, 숨겨진 개발 비용이 없는지 등 몇 가지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에 딥시크 쇼크로 인한 영향이 구체화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공지능반도체대학원장 유회준 교수는 "(이제 막 나온 딥시크에 대해) 너무 섣부른 판단들이 있는 것 같다"며 "한 가지로 결론을 내릴 수 없고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빅테크들이 딥시크를 검증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국내 기업들도 연구를 시작했다.
LG AI 연구원 등 AI 모델을 개발하는 기업들이 최근 딥시크 AI 모델의 테스트와 분석을 시작했으며, 반도체 업계 역시 상황 파악에 나섰다. 김재준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부사장은 지난달 31일 실적 설명회에서 딥시크발 충격과 관련해 "GPU에 들어가는 HBM을 여러 고객사에 공급하는 만큼 다양한 시나리오를 두고 업계 동향을 살피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제한적인 정보로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시장 내 장기적인 기회 요인과 단기적인 위험 요인이 공존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딥시크와 같은 저가형 반도체로 AI 모델을 개발하는 업체가 많아질 경우, 당장 수익성이 높은 최첨단 HBM을 판매하는 데는 부정적 영향이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는 HBM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헬로티 서재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