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 데이터에 '맥락'을 부여하는 'AI-Ready ERP'가 제조기업의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생성형 AI와 AI 에이전트가 업무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ERP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고 있다. 그동안 ERP는 구매와 생산 판매 재무 활동을 데이터로 기록하고 전표로 정리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그러나 AI가 기업의 상황을 직접 이해하고 판단하는 시대에는 이러한 기록 중심의 구조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그 대안으로 ERP가 축적하는 데이터를 AI가 곧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설계하는 'AI-Ready ERP'가 부상하고 있다. 현대오토에버 장해진 실장은 이를 ERP에 AI 기능을 하나 추가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으로 설명한다. 데이터의 의미와 상호 관계를 설계 단계에서부터 정의해 두어야 이후 경영 판단과 AI 의사결정에 그 데이터가 제대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데이터의 양이 아니다. 제조기업은 이미 방대한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생산라인에서는 설비와 품질 데이터가 발생하고 MES와 PLM ERP에도 구매 생산 재고 원가 정보가 축적된다. 관건은 이들 데이터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한 라인에서 발생한 부품 부족이 다른 라인의 생산계획과 납기 원가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AI가 판단하려면 숫자의 나열만으로는 부족하다. 각 데이터가 어떤 업무와 제품 공정에 연결돼 있는지를 드러내는 맥락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맥락을 떠받치는 축이 BOM(Bill of Materials)과 기준정보다. BOM은 제품을 구성하는 부품 목록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자재가 어느 제품으로 이어지고 품질과 생산 원가에 어떻게 작용하는지까지 담아내는 제조 데이터의 골격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현장에서는 BOM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전담하는 조직이 없거나 PLM과 MES ERP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단절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현대오토에버 송현섭 팀장은 중견 중소 제조기업이 반복해서 겪는 문제를 지적한다. ERP는 이미 구축돼 있지만 활용도가 낮고 생산 구매 데이터가 재무 전표까지 연결되더라도 원가와 수익성을 분석하는 단계에서는 수치가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기준정보가 표준화되지 않고 MES와 PLM QMS ERP가 분절돼 있어 현업은 다시 엑셀에 의존하게 되며 자동화나 AI를 적용할 기반도 취약하다.
AI-Ready ERP로 전환하려면 세 가지 요소가 뒷받침돼야 한다. 첫째는 데이터 거버넌스다. BOM과 Material Master를 어떤 기준으로 정의하고 관리할지 그리고 그 책임을 누구에게 둘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는 현황 진단이다. 차세대 ERP를 검토할 때 제품 비교에 앞서 자사의 프로세스와 시스템 데이터 그리고 운영 거버넌스 수준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 셋째는 추진 순서의 정립이다. 어느 부분이 취약한지 어느 수준까지 개선할지 DX와 AX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지를 정해야 ERP 투자의 우선순위도 분명해진다.
역설적으로 AI가 발전할수록 ERP의 가치는 오히려 커진다. AI가 기업을 이해하려면 해당 기업이 어떻게 구매하고 생산하고 판매하며 원가와 수익을 계산하는지를 설명하는 구조화된 데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AX 시대의 ERP는 'AI를 덧붙인 ERP'라기보다 AI가 기업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업무와 데이터의 맥락을 제공하는 ERP에 가깝다. 결국 AI 전환의 성패는 어떤 기능을 도입하느냐가 아니라 기업이 스스로의 데이터를 얼마나 정확히 진단하고 연결해 두었느냐에 달려 있다. 제조 현장의 데이터에 맥락을 부여하는 작업이 AI 시대 ERP 전략의 출발점인 셈이다.
헬로티 구서경 기자 |























































